며칠 전에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뭉치가 대만에서 나오게 됐는데요. 선생님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해서요."

 

 

외국에서 책이 나오는 것은 베스트셀러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더니 내 책 같은 스테디셀러도 해당이 되다니. 그 책이 처음 나온 것이 94년인데 무려 14년이나 지나서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간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워낙 책이 좋으면 그렇게도 되네요." 객관적인 정보를 결여한 덕담이다.

 

그래도 나는 희희낙낙해서 내 이름을 한자로 일러주고, 서울대를 나온 출판사 주간이 뜻밖에도 한자에 강하지 않다는 사실에 우스개 소리를 하다가 봄이 좋으니, 부암동에 꽃이 곧 필 것 같다느니 히히 헤헤 웃는 이야기만 하다가 끊었다. 아, 물론 번역서가 나오거들랑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동네방네 알리라고도 주문했다. ^^

 

우선 딸들과 친구한테 문자를 쳤더니

 

맏딸은 '파티를 해야겠다'고 하고 둘째는 '이제 국제스타!'라고 축하문자를 보내준다. 그림책작가이기도 한 친구는 걔 그림책이 벌써 두 권이나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식을 일러준다. ㅎㅎ 그래 너는 국제적인 작가고 나는 아시아 작가다~ 외국에서 책 내는 것이 이젠 아주 흔한 일인가 보니 보도자료는 말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날 밤, 케익을 사들고온 큰딸이 차근차근 묻는다.

 

대만 어느 출판사에서 나오며

 

중국어판 제목은 어떻게 짓는지

 

계약조건은 어떻게 되며 계약금은 받았는지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대만출간이 이뤄지게 됐는지

 

헌데 이런 걸 하나도 모른다. 나는 동화작가일 때는 기자라는 속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모양이다. 아니 기자 이전에 그냥 보통 사람으로 궁금해할 내용조차 묻지 않는다. 그냥 신나하고 웃고 떠들고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심지어는 '내가 요즘 케이블에서 대만 드라마 '사랑의 향기'(추자연이 나온다)를 재미있게 봤더니 인연이 이어졌나'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사랑의 향기는, 겨울연가, 가을동화, 천국의 계단 류의 한국 드라마 공식을 얼추 따라가는 드라마인데, 대만 사람들 참 순(진)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지는 드라마이다.)

 

중국어판 인세가 나오면 대만을 한번 가야겠다. 고궁박물관, 그게 딱 내 취향이기 때문이다.

큰 애가 괜찮은 대학 공대에 들어갔다. 반수해서 간 대학이니까 대단하다고 무등을 태워주진 않았다. 엄마가 작년 한 해, 취직공부한다 집수리한다 하면서 수험생을 챙겨주지 못했는데 대학도서관에서 저 혼자 힘으로 공부한 것이 장하다고 궁둥이는 토닥여주었다. 

 

입학식을 앞두고 대학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수학시험을 봐서 반편성을 했단다. 여기서 딸이 심화반에 들었다. 20개 반 가운데 2개반을 뽑았는데 거기 뽑혔단다. 신입생 가운데는 과학고 출신들도 수두룩하다는데 수학이 상위 10%에 들었다니 이건 정말 기분이 좋았다.

 

큰 애를 가졌을 때 나는 태교삼아 '수학의 정석'을 풀었다. 애가 나를 닮아 수학을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한국 평균으로 내가 수학을 못한 것은 아니었고 방정식 수열 순열은 잘했는데 미분 적분의 개념을 전혀 몰랐다. 물론 다시 공부를 해도 미분 적분까지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교 때문에 아이가 수학을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때는 나를 닮아서 음치가 될까봐 피아노를 배웠는데 막내는 애들 셋 중에서 유일하게 음치이다. 하긴 중학교에 들어가는 셋째가 전자기타를 갖고 싶어해서 우선 통기타로 연습하라고 제 아빠가 대학시절 쓰던, 고장난 기타를 수리해서 최근 안겨주었는데, 이게 계기가 되어 아들이 작곡가라도 된다면 '엄마가 태교 삼아 피아노를 배웠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상과는 거리가 있듯이 나의 수학태교도 딸내미의 수학실력과는 무관하다. 큰 애는 중학교 때까지 수학을 특출나게 잘하지 않았다. 그저 노는 것만 아주 잘하는 튼튼한 아이였다. 

 

걔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연년생 동생과 함께 영재수학이라는 방문교사 교육을 받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문제를 많이 시키는 이 방문교사 교육이 머리에는 도리어 나쁠 것 같아서 안된다고 했더니 둘째가 "엄마, 계모야? 왜 엄마는 공부도 안 시켜줘?"해서 하는수 없이 시작을 했다. 당시 살던 쌍문동 아파트에서는 이걸 안하는 애들이 거의 없었으니 이것도 드라마나 개그프로처럼 저희들만 빠지면 서운한가보다 했다.

 

헌데 둘째는 콧물을 닦아가며 1년 이상 이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첫째는 한 두달 하는둥마는둥 하더니 그만 두었다. 그러면 또 그러마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때 열심히 한 둘째보다 첫째가 수학을 잘한다. 문과이긴 하지만 연년생인 둘째가 학원에 전혀 안가고도 수학을 거의 매번 만점 맞도록 가르친 사람이 언니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전국 수학학력평가를 한 적이 있다. 딸은 여기서 76점을 받았다. 그리고는 36점을 받은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다. 똘망똘망해보이는 손녀친구가 36점을 받은 시험을 손녀딸은 76점을 받았다니까 할머니는 그 시험이 무척이나 어려운 것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퇴근을 하니 시어머니가 그 자랑부터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으며 "너희 반에 80점 이상 받은 사람이 몇 명인데?" 했더니 "응, 절반 넘어"란다. (시험 못 본 친구를 동행해서 제가 못하지는 않은 걸 보여주려고 할지언정 우리 딸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안한다.)

 

내가 그 애의 잔머리에 더 어이가 없어서 "아이구, 이 놈아, 너는 잘 하는 게 뭐냐"고 했더니 딸이 이랬다. "엄마, 나 체육은 잘 해."

 

그랬다. 딸은 달리기를 잘해서 학교에서 매일 다른 아이들의 달리기 도전을 받아줘야 했고 친구들과 자전거 경주를 하느라, 아파트 지하를 아지트 삼아 탐정클럽활동을 하느라 매일이 분주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친구들이랑 자전거로 성북동 집에서 창경원까지 다녀왔다. 쌍문동으로 이사한 4학년때는 반에서 13명짜리 축구팀을 만들어 모든 반에 축구팀이 생기게 만들었다. 물론 매일 하루에 한 반이상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수학학원을 다니겠다고 해서 보내주었더니 엉뚱하게 친구랑 한반 하려고 분반시험도 안치고 제 실력보다는 한참 떨어지는 반에서 어슬렁거린다고 학원선생이 일러주길래 그냥 끊어버렸다. 당시 큰 애의 전교 석차는 380명 중에 190등 바깥에서 주로 움직였다. 수학이 딱히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걱정이 되어서 중 3 겨울방학때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다니는 6촌 여동생을 불렀다. 이때 3개월 동안 중학교 과정 수학을 확실히 깨우친 것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가서 수학만은 잘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두고 공부를 어떻게 하면 잘하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딱하다. 초등학교 때는 그저 놀리면 된다. 놀려야 한다.

 

작년에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막내를 과학고에 보내볼까 싶어서 특목고에 자녀 둘을 보낸 동서한테 비결을 물은 적이 있다.

 

동서 말이 이랬다. "형님, 딱 맞네요. 이제부터 학원에 보내서 미분 적분부터 가르치세요." 뭔 소린가 했더니 특목고를 가려면 진작부터 고등학교 수학을 떼야 한단다. 초등학생한테 미분 적분을 가르친다면 그건 아동학대이다. 머리가 너무 뛰어나서 혹사를 시키지 않으면 휴식이 안되는 천재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두뇌는 나이에 따라 성장을 한다. 그 나이에 맞춰주지 않고 억지로 미리 가동을 해버리면 그 두뇌는 필연코 고장이 난다. 그런데 과학고에 보내기 위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동서한테 "아이구, 됐네"하고는 말아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과학고를 나오고도 정작 대학에 가서는 수학심화반에 못 든 아이들은 너무 일찍 미분 적분을 배우다가 지친 아이들은 아닐까 싶다. 

 

물론 대학 신입생 때 수학실력도 다가 아닐 것이다. 공부야 대학부터가 시작이다. 어린 시절을 신나게 뛰어논 덕분에 딸은 공부할 체력을 충분히 갖췄고 공부를 질릴만큼 해보지도 않았으니 조건이 좋은 셈이다.

 

마라톤 선수라고 해서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걷기를 빨리 시킨다고 보행기를 서둘러 태우면 오히려 아이들의 성장이 나빠진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재능이든 어른이 되어 경쟁이 필요할 때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일찍부터 잘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윤송이씨에게도 엠아이티 박사를 일찍 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후 어른이 되어서 창의력을 갖고 사회에 새로운 것을 던져줄 줄 알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송유근군이 일찍 대학에 들어간들 학업에 쉬이 피로해진다면 빠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들이 실컷 놀면서, 사는 게 왜 이리 좋은가를 가슴 뻐근하게 즐겨야 할 어린 시절에 공부 공부 좀 제발 하지 말자.

                                                  <이미경의 잉크펜화, 모스크 사원처럼 아름다워진 욕실>
 
'월화수목금토일 차분디르의 모험'(이하 '차분디르')은 내가 낸 책 가운데 아마도 가장 안 팔린 책이지 싶다.
 
물론 세상에 나온지가 가장 어리니까 그 점을 위로삼고는 있다.
 
이 책이 안 팔려서 아쉽다. 내가 초대한 멋진 화가가 세상에 뜨지 못하니까 그것도 아쉽다.
 
그래서 내가 블로그에 소개를 하려고 한다. 이 착하고 재주 많은 화가를....
 
내가 처음 '차분디르'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은 2003년 2월쯤이었다. 그 때 나는 문화부장을 1년만에 마치고 편집위원이 되어서 앙앙불락하던 때였다. 그때 어느 출판사 편집자가 고등학교 후배라며 찾아왔다. 물론 일면식이 없는 후배인데, 긴 생머리의 고운 처자였다. 동화를 한 편 써달라고....그 때까지 내가 낸 동화라고는 '뭉치' 시리즈 뿐인데 이 조차도 살아있는 모델 - 딸 - 이 있었던 덕이었으니 동화를 더 쓴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씩 출판사에서 작품을 달라는 전화가 오면 마치 잘쓰는 글을 바빠서 못 쓴다는듯이 흰소리나 치고는 끊고는 했다.
 
그런데 이 편집자의 진지한 태도가 마음을 흔들었다. 앙앙불락하던 때라 작품을 쓸 때인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쓰마고 하고는 무엇을 쓸까를 생각하는데,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액자속에 까만 머리의 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는 모습인데 그 뒤로는 복숭아꽃이 핀 나뭇가지에 파란새가 한마리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테두리는 페르시아 세밀화처럼 인동무늬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이 소녀의 이야기를 쓸테니까 이 이야기에 그림을 그릴 사람은 페르시아 세밀화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화가여야 한다고 편집자한테 강조를 했다. 글보다도 그림이 더 중요한 작품이라고 누차 강조를 했다.
 
화가를 찾는 작업은 2003년 2월부터 시작됐지만 2004년 5월쯤 작품을 완성하고서야 홍익대 조소과 출신의 이주윤이라는 젊은 화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 세밀화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화려한 색채감각과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사실묘사가 특징이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개성을 잡아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그의 그림을 보고 싶으면 정해왕씨가 글을 쓴 '코끼리 목욕통'을 보면 된다.)
 
오로지 인터넷에 뜬 그림만을 보고 고른 화가인데, 만나보니 동화책의 배경이 된 한남동의 이슬람 사원 부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때는 바로 이 화가를 위한 동화책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화가는 손이 느렸다. 책이 나와야 할 10월까지도 그림을 한 점도 보여주질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장에 탈이 나서 입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책을 빨리 내고 싶은 출판사에서는 화가를 바꾸기를 희망했다. 나로서도 동의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주윤씨는 몹시도 아쉬워하면서 다음 작품을 꼭 함께 하자고 했다.
 
화가가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내 마음이 흔들렸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판사에는 6개월만 더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 6개월이 끝날 때까지 나는 한 글자도 건드리지믈 못했다. 그러다가 대학 동호회 사이트에서 후배가 퍼올린 그림을 하나 보게 됐는데 그 그림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홍익대에서 유화를 전공한 화가의 채색펜화인데 색색의 펜으로 짧은 선을 그어 시골의 구멍가게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이 그림도 페르시아 세밀화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데생이 충실하고 그림은 사실적이면서 색채는 환상적이라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림, 그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 화가를 출판사에 적극 추천했다.
만나보니 화가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짜리 아이들이 있는데 자녀들을 위해서 도서관 사서봉사를 자원하며 지내다보니 어린이책도 많이 읽은 전문가였다. 그는 내 글에 대해서 편집자도 못해준 평을 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를 만나고 글을 다시 손볼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그 화가를 만나기 위해 이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구나, 이 또한 무슨 기묘한 인연인가 싶었다.
 
이 화가는 손도 빨라서 한달 반만에 대부분의 그림을 다 그려냈다. 펜화로 그린 그의 그림은 책으로인쇄된 것에서는 안 나타나는 깊이가 있다.(물론 나는 출판된 상태의 그림도 좋아한다.)
 
차분디르가 많이 팔리면 출판사에서는 이 화가의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책이 잘 안 팔려서 현재까지는 성사가 난망인 실정이다.(어째 글이 앵벌이성으로 가는 경향? ㅋㅋㅋ)
 
이 화가의 그림은 그의 홈페이지(leemk.com)에서 볼 수 있다. 이미경씨를 소개합니다.